별빛과 커피 향 사이에서
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언제나 그곳에 있다.
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박힌 별들은,
이미 수천 년 전, 혹은 수억 년 전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.
그러나 나는 지금, 이 순간에도 그들의 빛을 본다.
죽은 별의 흔적이 내 눈동자에 닿는 이 기묘한 시간의 층위에서,
문득 깨닫는다.
우리가 사는 ‘현재’라는 것도 사실은 지나간 과거의 잔향 위에서
아슬하게 서 있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.
그럴 때마다
내 존재는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작아진다.
그러나 바로 그 작음이,
역설적으로 나를 무한에 닿게 한다.
장자는
“인생은 대롱 속 바람과 같고, 죽음은 바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”이라 했다.
삶과 죽음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.
강을 따라 흘러가는 한 조각 나뭇잎처럼,
우리는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잠시 이름을 얻고, 모양을 얻고,
그러다 다시 흘러가 바다로 합쳐진다.
그러니 어찌 삶을 움켜쥐려 발버둥치겠는가.
어쩌면 자유는, 놓아버림 속에서만 찾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.
불교는 그 자유를 ‘공(空)’이라 불렀다.
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,
수많은 인연이 만나고 흩어져 잠시 형체를 빌려 있을 뿐이라고.
내 손에 들린 커피 한 잔을 바라본다.
깊은 갈색 속에 녹아 있는 것은 단순한 액체가 아니다.
먼 남쪽 나라의 비와 햇살, 커피나무를 키운 농부의 손,
바람을 타고 건너온 향과 시간,
그리고 오늘 아침의 나까지.
그 한 잔 속에는 수많은 세계와 우주가 겹겹이 스며 있다.
나는 혼자가 아니고, 내 하루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.
나라는 존재 또한 수많은 인연과 우연이 빚어낸
잠시 머무는 파동일 뿐이다.
칸트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고백했다.
“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은 나를 경외하게 한다.”
나는 우주적 미립자에 불과하지만,
나의 의식은 무한을 사유하고, 별빛 너머의 질서를 그린다.
유한한 존재임을 아는 동시에 무한을 향해 발돋움하는 힘,
그것이 인간만의 특권이자 저항이다.
칸트가 말한 그 경외감 속에서,
나는 나 자신의 유한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
그 한계를 넘어서는 길을 본다.
어쩌면 이것이 위버멘시의 첫걸음일 것이다.
한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,
그 한계를 딛고 새로이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.
창가에 앉아 커피를 들고 다시 하늘을 본다.
어젯밤 별빛은 여전히 내 시선에 닿고,
바람은 계절의 경계를 넘나들며 창문을 스친다.
오늘이라는 하루는
길게 이어진 시간의 강에서 잠깐 부서지는 물거품 같지만,
그 속에 담긴 향기와 온기,
심장 박동의 미세한 떨림은 결코 작지 않다.
삶은 늘 끝과 시작을 동시에 품고 있다.
겨울은 봄을 준비하고,
죽음은 또 다른 형태의 탄생을 품는다.
그리고 나는 그 순환의 가장자리에서
짧디짧은 이 하루를 느끼며 숨을 쉰다.
무한한 우주 속에서 티끌 같은 한 인간,
그러나 이 티끌 같은 존재가
커피 한 모금 속에서
별빛을 느끼고, 영원을 사유한다.
나는 무한을 닮은 유한이고,
유한 속에서 무한을 발견하는 존재다.
커피 향이 천천히 퍼지는 이 순간,
나는 안다.
아무것도 영원하지 않기에,
지금 이 숨결과 오늘의 빛은
더욱 소중하다는 것을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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